
그럼에도 [노력 = 능력 = 성공]이라는 등식은 [게으름 = 무능 = 가난]이라는 등식으로 자동 연산되어서 가난의 이유를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차별과 계급을 정당화한다. 무한한 기회가 열려있는데도 가난한 것은 너의 탓이니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하면 쪽팔리다.
이러한 일상적 혐오에 대해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는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열패감을 보상받기 위해, 얄팍한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타인을 모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찌질한가.
그런데 생활기스는 모든 형태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아무리 좋았던 관계라 해도 흠집이 생길 때가 있고 문제 한 톨, 서운함 한 점 없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손상이 크다면 새로운 관계를 찾는 편이 낫다. 하지만 살다 보면 생길 수도 있는 생활 기스 때문에 마음속으로 탈락을 외친다면 남아나는 관계 또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싸움이나 국론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해 문제의 해결책과 제대로 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
안전에 대한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듯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핵심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감과 도덕성에 의존하는 사회 시스템의 후진성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스템에 대한 논의에는 닿지 못한 채 개인을 비난하는 것에 머무르거나 문제의 본질이 아닌 진보, 보수를 나누는 독선적인 편가르기로 담론을 뒤바꾸곤 한다.
진인사 대천명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희망은 원래 조건부다.
피천득은 <장수>라는 글에서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1년을 낭비한 걸까?
괜찮아. 1년 더 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