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시선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왔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틀려싸고, 내가 판단하는 내 모습이야말로 진짜 나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있는 그대로’라는 테마는 이처럼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겼고 그것은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세잔을 선물해준 이게엑 계속해서 의문을 던져야 했는데, 종래엔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과라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한 거야. 그것이 바로 사과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사과를 존중해야 하지?”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사과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데 그보다 더 복잡하고 커다란 가치를 어떻게 알아보고 존중할 수 있겠어?”
만에 하나 나의 몸이 회복되어,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끔이라도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일주일의 식사가 총 스물한 끼라 했을 때 그중 단 몇 끼만이라도, 아.. 하루는 시원한 고기육수에 두텁고 탄력 있는 면발을 입안에서 뚝뚝 끊어가면 냉면을 먹고…
또 하루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들인 빵과 떡볶이, 라면 등 밀가루 음식들과 눈물 어린 재회를 하고…
나머지 한 끼는 고기나 회를 술과 곁들여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약속한다. 그 외의 식사에서는 단호히 절제할 것이다.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밖엔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엄마가 말을 걸면 왜 화부터 날까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야. 자유를 포기해야 결혼을 할 수 있고 동물의 본능을 거세해야 사람과 살 수 있고 자식과 부모 둘 중 어느 하나는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동거가 가능한 것처럼. 그때 고양이라는 생물에게 발톱이 갖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헤아렸더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모르겠어.
같은 언어를 쓰지만
표현은 서로 다른
우리는 이토록 개별적인 존재들.
누가 그런다. 내가 마음을 열면 상대는 항상 달아나더라고. 난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이 문제일까, 당신이 문제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내가 늘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들이 늘 내게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